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쿠데타 (문단 편집) == 실패 원인 == 사실 강경파 쿠데타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1/nwdesk/article/1851206_30445.html|관련기사]] 우선 쿠데타를 기획한 강경파들이 [[주권국가연맹]]을 창설하는 신연방조약을 저지하기 위해 너무 즉흥적으로 거사를 치르느라 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쿠데타군은 언론과 통신을 장악하지도 못했고, 군부를 통제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옐친의 인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그를 건드리면 더 큰 민중의 반발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옐친을 내버려 둔 것은 큰 실수였다. 옐친이 매우 신속하고 단호하게 움직여 반쿠데타 운동을 총지휘한 것이 패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건파들은 개혁을 막고 종래의 체제를 지켜나가자는 구시대적인 비전밖에 제시하지 못했는데, 이미 오랜 경기 침체에 지친 소련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1964년에 흐루쇼프가 물러나고 브레즈네프가 등극했을 때는 흐루쇼프 본인이 농업정책의 실패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 무기력한 대처를 했던 연유로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이 되어도 대다수의 공산당원이나 인민들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직은 소련이 지속적으로 성장했을 때였기도 했고 동유럽 공산국가들도 건재했을 때여서 소련 자체에 대한 반발이 커지지는 않았지만, 8월 쿠데타 당시에는 이미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체제가 뒤바뀐 뒤였고 소련 자체도 이미 일부 공화국들이 이탈하는 등 흔들리고 있던 상황인데다가 러시아에서 공산당을 탈당한 옐친이 야당 세력을 자처하며 이미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여타 지역이라고 해서 온건파의 입지가 탄탄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방 세력이 고르바초프에게 신속히 지지를 선언한 것도 쿠데타 세력의 입지를 좁힌 중요한 원인이었다. 소련 강경파는 옐친이 이끄는 시위대를 [[천안문 6.4 항쟁]]처럼 진압하지 못했다. 강경파가 [[보리스 옐친]]이 이끄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부를 장악했어도 분리 독립을 막을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반발에 부딪쳤을 것이다. 이미 소련 내에서 공산당의 통치는 종막을 고하고 있었으며, 일부 공화국은 독자적인 독립 움직임까지 보였다. 체제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인원들이 일방적으로 이를 되돌리려 했지만, 이에 반대해 레닌그라드, 키예프, 모스크바 등 전 연방에서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즉 강경파 쿠데타가 성공했어도 소련이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현실성을 따진다면 차라리 '강경파 쿠데타가 없었다면 소련이 신연방조약에 의한 느슨한 [[주권국가연맹]]의 형태로라도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입장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어쨌건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완전히 해체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소련의 해체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옐친이지만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 결과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발트 3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몰도바를 제외한 나머지 9개 구성국에서는 소련 존속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고르바초프의 구상대로 신연방조약이 체결되었다면 정 독립을 원하는 6개 구성국에 대해서는 독립을 인정하더라도[* 사실 해당 6개국의 독립 요구는 상당 부분 [[민족주의]]적 입장에도 근거한 것이라 쉽게 달래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였다.] 나머지 9개 구성국은 (중앙집권적인 소련 시대보다는 각 구성국의 자치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 형태로라도 소련의 명맥을 이어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사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의 9개 구성국이면 영토로든 인구로든 소련의 대부분을 유지 가능했다.]. 그런데 쿠데타의 주도세력은 어디까지나 소련 중앙정부, 즉 본래대로라면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경쟁 구도에서 고르바초프의 기반 역할을 해 줘야 했던 세력이었다. 결국 8월 쿠데타의 실패로 쿠데타를 주도한 소련 중앙정부와 소련 공산당이 완전히 무력해지면서 고르바초프 역시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력해졌고, 이 때문에 이후의 정국 주도권을 옐친에게 완전히 빼앗기고 소련 역시 완전한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결국 8월 쿠데타의 지향점이 '소련의 유지' 에 있었다고 본다면, 실현 불가능한 목적을 위해 무리수를 사용하다 결국 그나마 실현 가능한 목표까지 실패한 전형적인 정치적 패착이었던 셈이다. 소련 온건파 쿠데타의 본질은 비록 약화되었지만 공화국 정부와 소련 정부의 요구사항을 절충시켜 [[주권국가연맹]]이라는 형태로 소련을 유지시키려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기존 소련 공산당과 정부관료들로 대표되는 [[노멘클라투라]]가 거부하고 지도력을 차지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를 전복시킨 사태였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와 옐친의 정치적 야심과 무능력이라는 악조건을 떠나 소련이란 체제 자체에 치명적이었다. 또한 쿠데타는 중앙정부 지도자(고르바초프)가 진행하던 개혁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전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노멘클라투라의 이기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고, 이 상황에서 소련 중앙정부가 유지될 정당성은 더 이상 없었다. 탈북한 전 주영 북한 공사였던 [[태영호]]가 저서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쿠데타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8월 20일에 아래와 같은 논평을 남기며 쿠데타 실패를 예견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외무성]]이 올린 문건에는 쿠데타 세력이 성공해 소련 정세가 안정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내가 볼 땐 성공하기 어렵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시민과 노동자를 동원해 지지 집회를 조직해야 한다. 공수부대와 탱크를 앞세운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군인들이 쓰는 쿠데타 방식이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쿠데타는 없지는 않았다. 폴란드가 예인데 친위 쿠데타의 성격이었다.] 공산당은 그러면 안 된다. 공산당대회를 열어 [[고르바초프]]를 비판하고, 시민과 노동자들로 군중집회를 열어야 한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당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이미 [[소련 공산당]]이 변질됐기 때문이다. 비상사태위원회가 당원을 동원하지 않고 군대에 의존하는 것을 보면 쿠데타는 실패할 것 같다. 우리가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 >----- >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70~71쪽 과연 그 다음 날인 21일에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으니 [[김정일]]의 예측이 들어맞은 셈이였다. 그 누구보다도 소련 붕괴를 가장 탐탁지 않게 여겼을 김정일도 저렇게 생각했을 정도니 실패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았던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